화장실에서 마시는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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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화장실을 갈 때마다 차를 미리 끓여서

컵에다 담아들고 들어갔다.

남자가 그 장면을 처음 목격했을 때는 일부러 모른 척했다.

마치 사춘기 때 누나가 화장실 휴지통에 버린

생리대를 못본 척 하는 것처럼.

남자가 모르는 어떤 '여성의 세계'가 있는 줄 알았다.

그녀와 더 가까워졌을 때 남자는 자신의 팔을 베고 누운

그녀에게 그것에 대해 물었다.

그녀는 볼일을 보면서 차를 마신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남자가 괴팍한 취미라고 놀리자 여자는 그간 이런 질문을

여러 번 받았는지 한숨을 쉬며 귀찮은 듯 대답을 이어나갔다.


"내 몸에서 가장 더러운 것들이

빠져나가서 텅텅 비게 되는 순간이잖아.

가장 깨끗한 것으로 채워 넣고 싶었어.“


남자는 눈을 조금 크게 뜨기만 할 뿐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녀는 남자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되려 그에게 무언가를 묻는 듯했다.


"또 다른 이유는... 그냥. 화장실에 있는 동안은 당신한테서도,

이 세상 그 누구한테서도 떨어져서 나 혼자 있어야 하는

시간이잖아. 좀 외롭다고나 할까.

난 외로우면 몸이 차가워지거든.“


남자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이불 속 공기를 가득 들이마신 채

그녀를 꼭 껴안고 숨을 멈추었다.

으윽! 작은 비명소리가 품 안에서 들리자

여자를 놓아주며 남자도 큰 숨을 내뱉었다.

그녀의 옷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부드럽게 등을 쓰다듬었다.

아이의 체온을 재듯 손등으로 그녀의 몸이 따뜻한지 확인을 했다.


다음 날 남자는 마당에 나가 버려진 공간박스를

큰 망치로 탕탕두드려 분리를 했다.

그 중에서 가장 깨끗한 나무판을 골라내었지만

이미 비바람을 맞아 거뭇거뭇 부랑자처럼 변한 상태였다.

달리 생각하면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는 듯 여유가 있어보였다.

너를 앞으로 나무랭이라고 칭하겠다. 남자는 혼자 생각하고

마당의 수도 아래서 나무랭이를 열심히 닦았다.

나무랭이를 말려놓은 후에 남자는 손이 시려워 주머니에

손을 넣고 바보 멍구처럼 철물점을 향해 뒤뚱뒤뚱 뛰었다.

머리 위로 기러기 떼가 끼룩끼룩 놀리며 지나갈 때는

잠시 멈춰서 구경을 했다.

귀가 잘 안 들리는 할머니한테서 철로 된 꺽쇠를 두개 샀고,

편의점에 들러 그녀와 밤에 간식으로 먹을 핫바도 두개 샀다.

집으로 돌아와 화장실 문 안쪽에 꺽쇠를 달고 

나무랭이를 얹어서 고정하니

금새 작은 선반이 완성되었다.


그날 밤 그녀가 회사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화장실에 가고 싶지 않느냐고 남자가 물었다.

그녀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우와! 작은 환호소리가 화장실 안에서 들리자

기대감으로 긴장했던 남자의 입가에 미소가 서렸다.

그날 이후 그녀는 나무랭이 선반에

차 한잔, 그리고 애정 한잔을 올려놓았다.

다만 그녀가 깜빡하고 컵을 들어내지 않은 채 문을 휙 열다가

두어 번 컵을 깨 먹은 경우가 생겼다.

쟁그랑 소리가 반복되자 남자는 역시 안되겠다며

양치용 컵 홀더를 사서 선반 바로 옆에다 달아주었다.

그리고 선반 위에는 남자가 화장실에서 즐겨 읽는

만화책과 시집을 가져다 놓았다.

생각해보면


'화장실에서 어떻게 차를 마시지?

하는 사람들도, 화장실에서 어떻게 책을 본다.


게다가 책과 차는 찰떡궁합이잖아.

남자는 그녀의 괴상한 행동들이 좋았다.

모든 사람이 결핍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우칠 무렵부터

남자는 결핍을 감추는 사람보다는 나름의 방식대로 풀어내는 사람이 좋았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덤덤하게 말해주는 여자가 좋았다.

남자가 결핍을 채워줄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는 있지만

조금은 끼어들어도 된다고 자리를 내어주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남자는 그 자리에 선반을 달아놓았다.

혹은 당신도 나에게 작은 비밀을 알려달라고 속삭이는 듯 했다.

외로움이 많은 남자에게 그 유혹은 편안함을 느끼게 해주었다.


시간은 흘렀고

여자가 기러기 아래에서 꺾어온 들꽃이

화장실 문 앞에 걸린 채 예쁘게 말라갔고,

수건걸이 옆 타일에는

남자가 가고 싶은 사막과 보고 싶은 낙타가 그려졌다.

여자는 남자 몰래 낙타 옆에다 조그맣게 여자 모양을 하나 그렸고,

남자가 그것을 발견하고서는 낙타의 등에 

남자 모양을 그려 넣을까 하다가 그냥

낙타의 얼굴을 자신과 비슷하게 바꾸어 놓았다.

아무것도 없는 이런 사막이라면 못생긴 낙타일지라도 

나를 사랑해주겠지.





또 시간이 흘러

사막과, 여자와, 남자를 닮은 낙타가 그려진 타일 주변으로

누군가가 푸른 밤과 별을 잔뜩 그려놓았다.












출처- 우연수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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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이네요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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