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해바라기의 노래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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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청거리는 걸음으로 병원 정문에 난 길을 따라 걸어 나왔다.
손수건으로 이마에 배어 나오는 땀을 계속 문질렀다.
간암 말기라니.
지난 일주일, 가끔 가슴에 통증이 심하게 오고 호흡하기 힘들다고 느꼈던 적은 있었다.
하지만 내가 아닌 타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절망적인 상황에 그 정도 고통이 느껴지는 것은 당연한 게 아닌가? 그렇게만 생각했었다.
50대 후반 언저리로 흰 가운을 입은 남자 의사.
박홍근이라는 명찰을 가슴에 단 의사는 내가 마치 잘못을 저지른 철모르는 초등학생인 것처럼 책망했다.
그저 일반적인 의사와 환자 사이는 절대 아닌 것 같아 입 다물고 가만히 모두 듣고만 있었다.
그리고 한 시간이 넘는 고주파온열암치료를 받은 후 약 봉투를 받아쥔 나는 도망치듯 부지런히 병원을 나섰다.
하이힐을 신은 다리가 자꾸 뒤틀린다.
병원 계단을 내려오다가 넘어져 멍이 든 무릎이 시큰거린다.
나중에 운동화나 서너 켤레 사야겠다.
겨우 6개월 여 남은 인생 뾰족구두 신는 것에 익숙해질 무렵이면 이 세상에 없을 터.
마침 병원 앞에 멈추고 손님이 내린 택시를 잡아탔다.
“왕십리로 가주세요.”
“왕십리 어디로 갈까요?”
운전사가 룸미러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
주소가 기억이 나지 않아 핸드백을 뒤져 지갑을 꺼냈다.
손에 쥔 주민등록증을 멀리하고 눈을 찡그려 간신히 초점을 맞춰 적혀있는 주소를 읽었다.
“푸른 솔 아파트 101동요.”
택시가 출발하자 핸드백에서 작은 손거울을 꺼냈다.
거울 안에 비친 내 얼굴.
어느새 나도 모르게 눈가에 눈물이 촉촉이 젖어 있었다.
“에그! 박복한 년.”
울음 섞인 중얼거림에 언뜻 룸미러로 나를 돌아보는 운전사와 눈이 마주쳤다.
“흐으흑!”
그의 시선을 피해 손바닥으로 입을 막고 슬픔을 토해냈다.
이제야 확실히 깨닫는 순간이었다.
이 아주머니 모습의 주인은 틀림없는 나라는 것을...
이제, 내 모습을 인정하고 열심히 살아보겠다고 결심했건만.
내게 남아있는 시간은 겨우 6개월 남짓이라니...
내가 아닌 타인을 나라고 믿으며 도대체 얼마나 많은 시간을 낭비해왔던 것일까?
택시에서 내렸다.
입구에서 들어가기 전 아파트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다시 고개를 돌려 맞은편에 있는 작은 공원과 그 옆의 어린이 놀이터로 시선을 돌렸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낯설었다.
마치 처음 보는 듯, 생소한 장소에 뚝 떨어진 느낌이다.
“..얼마나 미웠으면...”
얼마나 자기 자신을 증오하고 부인하면서 살면 이 정도로 처참한 인생이 되는 것일까.
자기 자신을 완전한 타인으로 느낄 정도로 스스로를 부정하는 인생을 살았던 것인가?
낮은 한숨을 내쉬고는 엘리베이터를 향했다.
“아!”
띠링 하는 청량한 벨소리와 함께 열린 엘리베이터.
역시, 현관문 앞에 선 나는 비밀번호를 기억해낼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지.”
휴대폰을 손에 쥐고 근처 현관문 도어락 업체를 찾아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30분 후,
머리가 듬성듬성한 아저씨 한 분의 손을 거쳐 새 도어락으로 교체하고 집으로 들어온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액정창에 떠오른 이름은 【장미부동산】
이런 곳에서는 또 왜 나를 찾는 것일까? 집이라도 내놓았던 건가?
목구멍에 묵직한 복숭아 씨앗이라도 걸린 것 같은 답답함을 느끼며 휴대폰을 귀에 갖다 댔다.
“여보세요?”
“이 여사님?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돼요? 어제도 전화드렸었는데에.”
귀에 착착 감기도록 사글사글한 중년 남자의 목소리가 귓속에 들려왔다.
“저를요? 왜애....요?”
“아니 왜겠어요? 외대 뒤쪽 상가건물 팔아달라면서요? 적당한 임자 나타나서 전화드린 거예요.”
“상가..건물요?”
뜻밖에 사내의 말에 놀라 눈이 똥그래져 물었다.
“이 여사님이 말씀하신 대로 20억에 팔려고 제 딴엔 노력할 만큼 다했는데, 여사님도 잘 아시다시피 요새 부동산이 불경기잖습니까. 그래도 19억이면 사겠다는 작자라도 나왔으니 정말 다행입니다.”
“......”
“뭐, 저희 부동산 말고 다른 데도 당연히 내놓으셨겠지만, 어디서든 20은커녕 이 금액으로도 팔기 힘드실 겁니다.”
“......”
“이 여사님께서 그렇게 꼬옥 20억은 받아야겠다는 생각이시면 어쩔 수 없지만,”
어떻게 돌아가는 영문인지 전혀 알지 못해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거절로 받아들인 부동산업자가 쩝쩝 입맛을 다시면서 말을 이었다.
“그래도 19억이면 현재 시세로 아주 잘 넘기시는 거예요. 그냥 안된다고 거절하시지 마시고 주변에 지인 동원하셔서 한번 지금 시세 알아보시고 내일 오전까지 답 주세요.”
통화를 마치고 방안에 들어왔다.
핸드백을 내려놓고 옷을 갈아입은 후 다시 집안을 탈탈 뒤지기 시작했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나의 경제적 상황을 확인해야만 할 터.
의자를 놓고 옷장의 윗부분까지 몽땅 뒤지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찾아내 손에 쥔 통장 5개.
현금으로 총 2억 6천만 원.
현 시세 7억 5천 한다는 아파트와 좀 전에 부동산업자로부터 전화 받은 상가건물이 내 소유였다.
컴퓨터로 더 찾아본 나의 과거.
주민등록 등,초본과 가족관계증명서, 그리고 혼인관계증명서까지 모두 인터넷으로 발급받은 후 내 손에 쥐어진 나의 모습.
그래도 준재벌이라는 부잣집으로 시집가서 아들 둘에 딸 하나를 낳고 살다가 십 년 전 이혼하고 그때부터 이 집에 들어와 혼자 살게 된 것.
이혼과 맞물려 비슷한 시기에 상가건물이 내 소유로 된 걸로 미루어보아, 이혼하면서 위자료였든 재산분할로 받은 거였든, 그렇게 내 손에 쥐게 된 것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나의 손글씨로 쓰여 변호사의 공증까지 받은 유언장.
‘거주 중인 아파트는 아들 우진현에게 상속하고 나머지는 모두 사회에 환원한다.’
“아니 왜에?”
20억 가까이 되는 상가건물을 내가 소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란 것보다 몇 배는 더 경악스러운 유언장의 내용에 입 밖으로 터져 나오는 기함을 멈출 수 없었다.
“도대체 뭣 땜에?”
머리가 띵 해와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누르며 다시 한번 유언장을 차근차근 읽어보았다.
2년 전 4월 자로 작성된 내 유언장.
“아니, 이 개x 같은 사회가 나한테 도대체 뭘 해줬다고 20억 넘는 돈을 환원해 줘? 내가 이혼하고 십 년 동안 혼자 이렇게 살아가는데 외롭다는 말 한마디 해줬어? 아니면 친구라도 하나 붙여줬어?”
짜증이 북받쳐 올라 쥐고 있던 유언장을 박박 찢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2년 전 내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유언장을 작성하게 되었는지 모르는 일.
기억이 날 때까지는 잠시 유언장은 그대로 두기로 했다.
그 와중에도 유언장의 내용 중 시선이 멈춘 곳.
‘우진현(子)’
내가 내 배로 낳은 자식이 셋이나 되며 그 중, 이놈에게 이 아파트를 물려주겠단다.
어떻게 생긴 녀석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슬며시 고개를 저었다.
그 녀석조차도 나와 오랫동안 왕래가 거의 없었다는 것이 확실했다.
휴대폰에 몇 되지 않는 연락처에조차 저장되지 않은 놈.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은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그저 핏줄이기에 마지못해 남겨주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설사, 만나게 된다고 하더라도 알아보지도 못할 놈에게 모성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을까?
아니 내 안에 모성이라는 것이 내재하기는 한 걸까?
눈앞의 모습을 나라고 인정하면서조차도 여전히 머리 한구석에는 ‘한유준’이라는 스물아홉 먹은 사내애가 정말로 나인 듯 떡 버티고 있는데...
“그건 그렇고...”
일주일 만에 처음으로 좀 가벼워진 마음이 되어 주방으로 향했다.
앞으로 살날이 6개월밖에 남지 않았다는데, 오히려 그동안 답답했던 마음은 편해졌다.
인간의 마음은 정말 가끔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어쨌든, 앞으로 얼마나 살든지 환자는 잘 먹어야 한다.
지난 일주일 동안 김치냉장고 안에 있는 신김치에 햇반을 데워먹고 라면을 끓여 먹었다.
하지만, 절대로 이제는 그렇게 살지 않으리라.
냉장고 문을 열어 보니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혼자 산다고 제대로 해 먹지도 않은 모양이다.
돈은 그렇게 쌓아놓고 뭐가 그리 아까웠는지 유통기한이 지난 떠먹는 요구르트와 우유, 즉석 냉면이 맨 윗 칸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확실하게 눈에 띄는 빨간색.
옷은 물론이고 구두도 빨간색이더니 빨간 파프리카가 담긴 비닐 한 봉지가 냉장실 한 가운데 떡 하니 자리 잡고 있다.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흐늘흐늘한 상태로...
비닐에 담아놓은 당근과 양배추도 물러서 물이 흐르고, 브로콜리는 시들시들하다 못해 푸르스름한 빛을 띠는 물컹한 곤죽으로 변해있었다.
요구르트와 우유는 싱크대에 쏟아버리고 나머지는 모두 음식물 쓰레기통에 처넣었다.
얼마 남지 않은 목숨, 맛있고 건강한 음식을 끼니때마다 챙겨 먹으며 건강도 유지하고 행복도 되찾아 살아보리라.
쇼핑 목록을 적으며 언뜻, 내가 휘파람을 불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대로 불려 나오지도 않는 입을 말아 모으고.
여전히 스물아홉 사내 녀석이 기분 좋을 때 무의식적으로 하는 행동이란 생각에 씁쓸한 웃음이 나왔다.
“...휴우.”
낮은 한숨을 내쉬다가 다시 피식 웃었다.
뭐 어떠랴? 아무래도 얼마 남지 않은 내 인생.
내 머릿속에 쉬운 다섯 아줌마가 살던, 스물아홉 사내놈이 살던 남은 시간 행복하게 살면 되는 일이다.
카트에 온갖 채소와 과일을 담고 주류코너에서 그럴듯한 샴페인도 하나 골랐다.
된장, 고추장에 갖가지 소스도 몽땅 긁어 담았다.
이미 내 머릿속에는 일주일 동안 해 먹어야겠다고 생각하는 메뉴와 레시피가 떠올라 있었다
기억 속의 나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요리를 잘한다는 말을 들으면서 살았다.
그게 내가 만든 가공의 인물이라고 해도 말이다.
‘한유준’이라는 녀석으로 산 기억 속에서, 나는 스무 살 때부터 싸구려 재료를 가지고 맛나게 요리해서 먹는 방법을 개발해냈다. 힘들고 외로운 때였지만 맛난 요리를 해서 먹는 재미로 살았다.
그리고, 한둘씩 사람들을 만나고 친해지면서,
내 요리를 먹어본 사람은 누구든지 나의 손맛을 칭찬했다.
그중에서 애인이었던 지호는 특히 내 요리 솜씨를 찬양할 정도였다.
끓는 물에 멸치와 무, 다시마를 넣어 맛을 내고,
칼도마 위에 감자와 양파, 호박을 썰어 넣는 내 손은 점점 더 바빠졌다.
이제 예전에 내가 그렇게 살았던 것처럼 남은 인생도 행복하게 살다 가기로 마음먹자 훨씬 가벼워진 마음.
찬장을 뒤져 그릇도 예쁜 것으로 꺼내 음식을 담았다.
식탁 위에 여러 반찬이 올려지고 따뜻한 국그릇에서 향긋하고 구수한 김이 올랐다.
흰 쌀밥 한 수저를 크게 떠 위에 온갖 반찬을 올려놓고 입으로 가져갔다.
“맛있다.”
까닭 모를 눈물이 핑 돌았다.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또 다른 누군가와 나눌 수 있다면.
이렇게 정성스레 만든 음식을 먹어주며 나에게 웃어줄 사람이 있다면...
그게 그냥 지인이든, 친구이든, 아니면....‘강지호’ 이든.
수저를 내려놓았다.
걸음을 옮겨 거실의 테이블로 향했다.
그리고 통화목록에서 ‘장미부동산’을 찾았다.
“아이고, 이 여사니임~.”
마치 구세주를 만난 듯, 황송하다는 듯, 간질간질한 남성의 목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저, 그 건물 그냥 19억에 거래하려고요.”
“정말, 잘 생각하셨습니다.”
남자의 기쁜 목소리가 귓속에서 울렸다.
“필요한 서류 잘 아시겠지만 문자로 다시 한번 보내드리겠습니다. 몇 시까지 오실 수 있겠습니까?”
“늦어도 열두 시까지는 가서 뵐께요.”
“알겠습니다. 저녁 식사 맛있게 하시고 내일 뵙겠습니다.”
마치 내가 저녁을 먹던 중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는 듯 사내가 너스레를 떤 후 전화를 끊었다.
다시 식탁으로 향하기 전 거실 한쪽에 있는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이런 모습으로 비현실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파울 플레이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곳은 내가 있어서는 안 될 곳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끽해야 6개월 남짓 남은 나의 인생.
이 몸뚱이에 걸맞지 않게 내가 그토록 진실이라고 믿고 있던 젊은 남자의 기억 속 세상으로 잠시 들어 갔다 온다고 해도 뭐가 그리 대단할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내가 내 자신이라고 철썩같이 믿고 있던 한유준은 어떤 사람일까?
아니 그보다 지금 이런 모습으로도 안타깝게 그리운 ‘강지호’를 먼발치에서나마 한번 보고 싶다는 갈망이 스멀거리면서 밀려왔다.
만일 그들이 실존하는 인물이라면,
그저 슬쩍 그들 주위를 맴돌면서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기에 이렇게 나의 마음속에 깊이 들어박혀 애간장을 녹이고 있는지 알아보고 싶었다.
강지호가 다니는 회사는 광화문에 있는 ‘UniSeoul Solutions’ .
그가 사는 곳은 행당역 근처 나우빌라 309호.
그것이 나의 기억 속에 있는 연인의 직장과 집의 주소다.
만약 이들이 현존하는 사람들이라면...
눈치채지 않을 정도로 거리를 두고 그를 한번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자, 나이 든 55세의 아주머니라도 심장이 쿵쾅거리며 설레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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