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해바라기의 노래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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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여섯 시 사십 분.

손에 전단지와 명함을 쥔 채 이제나저제나 하며, 나는 가게 앞을 맴돌고 있다.

 

지호가 퇴근하고 가게 앞의 도로를 따라 걸어 올라올 시간.

 

9월 하순에 접어들자 어느새 짧아진 해로, 이미 거리는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했다.

끝없을 것 같던 더위도 슬그머니 물러나 이제 땅거미가 질 때면 주변에 선선한 가을 냄새가 묻어난다.

하나둘씩 거리의 네온사인 불빛이 들어오며 퇴근길의 직장인들 모습이 눈에 띈다.

힘겹게 또 하루를 보낸 사람들이 코쿤 안에 들어가 에너지를 충전할 시간.

 

그리고,

드디어 그들 중 내가 기다리던 얼굴이 나의 시야에 들어왔다.

멀리 있어도 그의 얼굴은 빛이 난다.

그의 얼굴 뒤에까지 번져 그를 돋보이게 하는 무지갯빛 오라.

한순간 주변인들을 모두 오징어로 만들어버리는, 그의 얼굴에서 번져 나오는 비교 불가능한 아름다움.

 

나도 모르게 입을 헤벌쭉 벌리고 바라보다가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에 언뜻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이제 내 앞 10미터까지 접근한 그의 앞으로 슬며시 발을 옮겼다.

 

저기...”

 

그에게 말을 거는 나의 목소리가 떨렸다.

 

?”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시선에 순간, 마치 심장이 멎는 듯했다.

주책맞은 이 중년 아줌마는 지금 두 눈에 눈물도 글썽하고 입술도 파르르 떨고 있겠지.

안 봐도 비디오다.

 

..우리 가...가게 오픈했어요. 식사하러 오시라고.”

. .”

 

내가 건네는 전단지와 명함을 얼떨결에 받아 든 그가 무심하게 나에게서 몸을 돌렸다.

 

아주 맛있게 해 드릴께. 한번 꼭 와요.”

 

언덕길을 걸어 올라가기 시작하는 그의 등 뒤로 마치 부탁하듯 그렇게 큰 소리로 덧붙였다.

그리고 호기심어린 눈빛으로 나와 그를 흘끗거리던 두어 명의 행인을 피해 얼른 가게의 문을 열고 들어와 버렸다.

 

 

따르르르릉

 

가게를 오픈하면서 설치한 유선전화기가 울렸다.

아직 아무에게도 이 일반전화의 번호를 알려준 적 없다.

 

광고 전단지를 만들어 준 가게와 낮에 그의 집에서 봤던 사내, 그리고 좀 전에 지호 이외에는.

그렇다는 건....

다 늙어가는 아줌마의 가슴도 이렇게 콩콩거리면서 뛸 수 있다.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전화를 들었다.

 

여보세요?”

 

전화를 받으면 자동적으로 상호명이 입에서 튀어나와야 하건만, 아직 입에 붙지 않았다.

 

여보세요오? 명자가?”

 

예상치 못한 억센 사투리를 쓰는 여성의 목소리가 귓전에 울렸다.

 

저 전화를...”

! 와 쓸데없는 말을 자꾸 해쌌노? , 나한테 뭐 악감정이라도 갖고 있는 거가? 아이고 참말로! , 니같은 불여시...”

여보세요!”

 

쉴새 없이 쏘아붙이는 그녀의 말을 악을 써서 끊었다.

 

전화 잘못하셨어요. 명자란 여자 없습니다.”

..그래예? 근데 와 소리를 그렇게 질러쌌능교?”

 

그렇게 말한 여자는 내가 뭐라고 덧붙이기도 전에 전화를 탁 끊어버렸다.

어이가 없어 벌린 입으로 웃음을 흘리고 한숨을 내 쉬었다.

 

따르르르릉

 

그럼 그렇지.

전화번호 확인도 안 하고 끊더니 또다시 같은 번호로 전화를 거는 게 틀림없다.

성격 급해서 상대방 생각 안 하고 자기 방식대로 사는 사람들의 종특이다.

 

여보세요.”

 

그래도 예의상 가능한 감정은 죽이고 수화기에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음식점이죠?”

 

기회를 봐서 쏘아붙이려고 잔뜩 준비 중이었던 나의 귓전에 뜻밖에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퍼졌다.

 

. .”

 

한순간 당황스러운 말투가 나도 몰래 튀어나왔다.

 

거기 [쓰레쉬 앤 애쉬] 아니예요?”

 

툭 튀어나온 내 말투가 이상했던지 남자가 다시 한번 확인했다.

틀림없다. 지호 목소리다.

 

. 맞아요. 쓰레쉬 앤 애쉬.”

거기 배달 되나요? 배민 찾아봤는데 상호가 안 나와 있어서 전화한 건데...“

죄송해서 어쩌죠? 오늘 오픈해서 아직 배달은 안 되고요.“

 

배달 안 된다는데?“

 

귓가에서 멀어진 그의 목소리. 낮에 만난 남자에게 묻는 것이 틀림없다.

 

가게로 오셔서 식사하시면 디저트로 콥샐러드 서비스해서 드릴게요.“

 

그의 입맛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다이어트 시작한다면서 그가 입에 대기 시작한 콥샐러드.

그의 입맛에 딱 맞도록 몇 주 동안 소스도 개발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마침내 그에게 내놓은 알싸하면서 새콤달콤한 소스가 얹힌 샐러드를 입에 넣고 똥그래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그의 얼굴을 아직도 나는 똑똑히 기억한다.

 

알겠습니다. 그럼 가야죠.“

 

희미한 웃음이 가미된 그의 목소리에 마음 한구석 자리 잡고 있던 불안감이 한순간 사라졌다.

 

금방 도착할 건데. 김치찌개 2인분 해주세요.“

알았어요. 지금부터 빨리 준비해드릴게요. 부지런히 오세요.“

 

밝은 목소리로 대답하고 전화를 끊자마자 재빨리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냄비 두 개를 불 위에 올려놓고 냉장고에서 돼지고기 앞다리살을 꺼냈다.

냉장숙성을 거쳐 잘 익은 김치와 양파가 카운터 위에 올려졌다.

대파와 새송이버섯을 깨끗이 씻어 올려놓은 후, 양손을 맞잡고 한번 카운터를 돌아보고는 손아귀에 부엌칼을 집어 들었다.

 

 

 

 

보글보글 끓는 김치찌개를 바라보면서 지호와 사내가 입맛을 다셨다.

 

비주얼은 끝내주는데?“

 

언뜻 사내가 지호를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의 말에 지호가 손에 든 수저로 뜨거운 국물을 떠서 입으로 가져갔다.

 

으음! 정말 맛있네요!“

 

카운터 뒤에서 침을 삼키며 바라보고 있는 나를, 지호가 두 눈을 똥그랗게 뜨고 건네보았다.

 

... 종로 한식 전문점에서 먹어본 것보다 훨씬 낫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흰 쌀밥 위에 돼지고기와 김치 한 조각을 올려놓고 입에 넣은 사내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다른 손님도 없으니 편하게 먹어요.“

 

문득 그런 말이 내 입 밖으로 나왔다.

서로 마주 보며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는 두 젊은 남자.

낯선 사내가 한유준이라면 둘이 연인 사이일 터.

 

입을 오물거리며 부지런히 수저를 움직이는 지호를 바라보다가 사내에게 시선을 돌렸다.

 

완전한 타인인 나의 눈동자에 비치는 그의 얼굴.

지호를 바라보는 그의 표정과 눈빛에 꿀 같은 애정이 뚝뚝 떨어지고 있다.

아마도 그런 그에게 내 자신의 감정을 이입하고서 지호와 이 세상을 바라보며 살았을 터.

 

자갸. 고기 좋아하니까 이거 더 먹어.“

 

사내의 손등을 슬며시 쥔 지호가 젓가락으로 자신의 앞접시 안에 있는 고기를 들어서 사내의 밥그릇 위에 정성스레 올려놓았다.

다음 순간 고개를 돌린 그가 언뜻 나와 시선이 마주쳤다.

삽시에 그의 양 볼에 발그레 홍조가 번졌다.

겸연쩍은 표정으로 나의 눈치를 보는 그 둘을 바라보며 내가 마음씨 좋은 아주머니 얼굴로 입을 열었다.

 

뭐 어때서? 둘이 아주 잘 어울리는데?“

”......“

나는 신경 쓰지 말아요. 그냥 딱 봐도 둘이 없으면 못사는 사이 같구만. 알콩달콩 서로 사랑하면서 살면 그걸로 된 거지. 안 그래요?“

 

내 말에 그들의 눈가 한쪽에 드리웠던 옅은 불편함이 사라지고 다시 안도감과 편안함이 자리 잡는 듯 보였다.

 

앞으로, 친구들도 데리고 와서 편하게 놀고 그래요. 술도 한잔하면서 늦게까지 놀아도 돼. 지금 당장은, 맥주는 크리스하고 소주는 천번처럼 밖엔 없지만, 원하는 거 말해주면 금방 들여놓을게.“

 

깔끔한 디자인의 큼직한 접시 위에 준비해놓은 청상추와 파프리카, 어린잎 채소등 샐러드를 듬뿍 담아 장식하면서 마치 호객행위라도 하듯, 그들에게 너스레를 떨었다.

 

정말요?“

 

뜻밖의 장소에서 낯선 사람에게 예상치 못한 호의를 받으면 아마 저런 얼굴에 저런 표정을 지으리라.

호기심 반 의심 반이 잘 버무려진 눈빛.

 

그럼요. 이제부터 우리 가게, 아지트로 삼아도 좋아요. 자주 놀러와요.“

고맙습니다.“

 

여전히 얼떨떨하고 완전히 의심을 떨쳐내지 못한 표정이지만 그들에게 분명 마음 편하게 올 수 있는 단골이 될 거라는 예상은 그리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었다.

 

그리고 평일이었음에도 그들은 맥주잔에 소주를 섞은 폭탄주까지 마셔대면서 열한 시 반을 넘기고서야 집으로 돌아갔다.

술에 취해 완전히 풀어져 헤벌쭉한 웃음을 입술에 걸고 지호와 그의 자갸는 기분이 완전히 업되어 가게 문을 나섰다.

 

이모!“

 

어느 순간, 지호가 나에게 이모라고 불렀다.

그가 내게 건넨 폭탄주 딱 한 잔 마신 것뿐인데 눈앞은 핑 돌고 세상은 어질어질하는 듯하다.

 

가게문을 닫고 집으로 돌아가기 전, 한쪽 벽에 걸려있던 커다란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이모...’

 

주름이 자글자글한 눈꼬리. 처진 볼과 팔자 주름. 얼굴에 잔뜩 낀, 감출 수 없는 기미.

희끗희끗 새치가 난 파마머리.

나도 모르게 손을 펴고 손바닥으로 이마 위부터 아래로 머리카락을 훑었다.

내 눈앞에 펴진 손바닥 안에 엉켜있는 빠진 머리카락 덩어리.

 

항암 치료의 어쩔 수 없는 부작용이겠지.


 

이제 길어야 6개월 후면 나는 이곳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마음 한 켠에 자리를 잡은 아쉬움이 사라지지 않는다.

실연당한 듯한 희미한 아픔도 검은 아지랑이처럼 스멀거리며 행복감의 발목을 쥐고 아래로 끌어당기고 있다.

 

그래도 좋았다.

언젠가 어딘가에서 느꼈던 아련한 감정이 이런 기분이었다.

깊은 기억 속에 자리 잡고 있던, 형체를 알 수 없고 형언할 수 없던 그리움.

카운터 뒤의 의자에 앉아, 술에 취해 행복한 얼굴로 떠들어대던 그 두 녀석과 함께 한 시간 동안, 내 인생의 중요한 열쇠가 내 귓가에 쨍그랑거리는 소리를 들은 것도 같았다.

 

이 작은 행복만은 빼앗아 가지 말아주세요.“

 

나도 몰래 믿지도 않던 신을 향해 입 밖으로 나지막한 읊조림이 새어나왔다.

 

내게 남은 시간 동안 이 한 줌의 기쁨만은 갖고 있게 해줘요.“

 

실체를 알 수 없는 신이 내 기도를 듣는다면 어떻게든 대답해 줄까?

 

제발....“

 

고개를 돌리는 내 입술이 떨리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휘청거리는 다리를 느끼며 다시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어두운 문밖을 바라보았다.

반투명한 유리의 다른 쪽에는 밤이 한창일 것이다.

지낼 곳 없어 거리의 이곳저곳을 배회하던 슬픔과 괴로움이 있다면 꼭 닫혀있는 저 문이 절대로 그들에게 들어올 틈을 주지 않길 바란다.

 

이제 간신히 내 손에 쥐어진 작은 행복이 뿌리를 내리고 자라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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