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해바라기의 노래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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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르르르륵

 

열린 가게 문틈으로 지호의 얼굴이 빠끔히 들어왔다.

 

어서 와.”

 

눈인사만 하고 다시 손을 부지런히 움직이는 나에게서 시선을 주위로 돌린 그가 과하게 코를 킁킁거렸다.

 

오오! 이 맛있는 냄새는...!”

 

그렇게 말한 그가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눈을 똥그랗게 뜨고 마치 환희의 함성이라도 외치듯 큰 목소리를 냈다.

 

오리 가슴살 스테이크에다가 툴롱 샐러드!”

 

양 손바닥을 찰싹 마주치며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린 녀석이 의자에 앉아 카운터 너머로 데코레이션이 끝난 접시에 담긴 음식을 보며 군침을 흘렸다.

 

애인은 같이 안 왔어?”

금방 올 거예요. 전 이모 보고 싶어서 먼저 왔죠.”

 

빈말이라도 기분 좋게 해주는 그를 보니 한 시간 넘게 레시피를 보며 진을 뺀 수고가 아깝지 않았다.

 

 

보름 정도 전, 인터넷에서 우연히 본 동영상이 있었다.

정말 맛있다는 댓글도 많이 달려 있었고, 그리고 또 비주얼도 그럴듯해 보이는 것이 꽤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그래서 한번 해 먹어보겠다고 생각해서 한번 시도해봤었다.

씹히는 식감과 입안에 오래 남는 아련한 향이 꽤 괜찮은 듯해서 오늘 이렇게 다시 한번 고생을 사서 시작하게 되었다.

 

하루하루가 가고 날씨가 점점 추워질수록 내가 얼마나 산다고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질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부정적인 사람이 되었다는 의미는 절대 아니다.

나는 천성적으로 태생이 상당히 긍정적이다.

그저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그런 말이 혀끝에 붙어있게 된 것일 뿐.

그것은 무엇인가 시간이 걸리고 귀찮은 일을 할 때마다, ‘지금 아니면 언제 내가 이걸 해 보겠냐라는 의미를 혼자 부여하다 보니 그렇게 되어 버렸다.

 

그렇게 처음 만들어 놓은 음식을 먹어보고 있을 때 지호가 가게에 들어왔었다.

일이 있어서 반차를 냈다면서 집에 가는 길에 들렀다면서 먹을 복은 타고났다고 너스레를 떨던 그가 한입을 먹어보더니 마치 바닥에 쓰러지는 듯한 시늉을 했다.

어디에 견줄 수 없는 천상의 맛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더니 나중엔 남겨 놓았던 식빵을 꺼내 접시에 남아있던 소스까지 싹싹 발라서 입 안에 넣었었다.

 

그렇게 맛있게 먹어주던 그가 고마워서 다시 한번 만들어 본 것.

나이프와 포크를 집어 든 그가 애인이 오기도 전에 입맛을 다시면서 오리 가슴살 스테이크 한쪽을 나이프로 썰었다.

 

와아! 진짜 맛있어요.”

고맙네. 어서 먹어.”

 

양쪽 입꼬리가 귀에 걸린 그가 눈가에 잔뜩 웃음을 지었다.

 

이건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에서 팔면 최소 십만 원은 받아야겠어요.”

 

열심히 입을 오물거리며 고기를 씹던 그가 다시 나이프를 들었다.

 

팽이 것까지 해서 제가 오만 원 드릴게요. 이모.”

 

지호는 자기 애인을 팽이라고 불렀다.

항상 뭔가를 하려면 굼뜬 동작 때문에 달팽이 닮아서 그렇게 부르게 된 거라 했다.

그런 자신은 용이라고 나에게 소개했었다.

비천한 태생에 이 정도 살아가는 것도 자신은 개천에서 나온 용이라 여긴다 했다.

 

그렇게 내 앞에서 본명을 부르지 않고 닉네임으로 부르는 걸 나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리 내가 그들을 살갑게 대하고 친해졌다 해도 나는 절대로 그들의 세계에 들어갈 수는 없다는 것을. 그리고 그들과 내 사이의 경계선은 고객과 음식점 주인이라는 범위를 절대로 넘어설 수 없다는 것을. 아무리 그들 속에서 이런저런 말을 섞어도 곧 그들은 나를 물에 떠 있는 기름으로 여길 거라는 것을.

 

아니 그렇게까지 생각하지 않는다 해도 얘네들 커뮤니티에서도 서로를 닉네임으로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여하튼, 그런 극복할 수 없는 거리감에 시간이 흐를수록 그를 내 기억 속 언젠가에 연인이었다는 허황한 생각은 거의 지워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어느 정도 넉넉한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것만으로 만족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걸 나는 인간이 가지게 되는 당연한 적응력이라 생각했다.

 

 

일없네. 이제 두 번째 만들어보는 건데 무슨 돈을 받는다고...”

그래도 이 정도 퀄이면 그냥 먹을 순 없죠. 이모 시간과 노력도 엄청 들어갔을 건데.”

괜찮아. 정말 맛은 있는 거지?”

그럼요. 그리고 이모가 그 정도는 받아주셔야 제가 또 얻어먹는데 미안하지 않잖아요. 부담도 느끼지 않고요.”

 

그런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럼 그렇게 할게.”

 

내 입에서 대답이 나오자마자 드르르륵하고 가게 문이 열렸다.

 

이모! 저 왔어요.”

그래. 팽이 잘 왔어.”

 

가게 안으로 들어와 카운터 아래에 있던 의자를 잡아당기던 그가 다시 나를 흘끗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이모, 모자 예뻐요.”

고마워.”

이제 봤냐? 벌써 한 달은 쓰고 계신 거 같은데...”

알지. 근데 지금 쓰고 계신 모자 바뀌었어. 전에는 테두리가 붉은 보라였는데 지금 건 완전히 빨간색인데? 스칼렛인가?”

 

눈썰미가 좋은데다 미묘한 변화도 감지하는 녀석을 보면서 나는 감탄을 했다.

 

역시. 팽이는 알아봐 주네.”

뭘요. 근데 빨간색은 이모한테 모두 다 잘 어울려요.”

그래?”

.”

 

지호의 접시 안에 있던 오리 가슴살 스테이크 한 덩어리를 통째로 포크로 찍어 자신의 접시에 옮겨 담으며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이모도 꽤 추위를 타시는 거 같아요. 아직 11월 중순인데 벌써 실내에서도 모자를 쓰고 계실 정도면. 이모를 오랫동안 안건 아니지만, 패션에 민감해서 쓰신 건 아니라는 생각도 들고...”

맞아. 내가 좀 추위를 많이 타.”

 

가발을 착용하는 것이 너무나 귀찮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 차선책으로 마련한 것이 모자였다.

 

머리카락이 보기 흉할 정도로 빠진 후 삭발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가발을 써보려고 했다. 하지만, 거울 앞에서 가발을 뒤집어쓰고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을라치면 아직도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 내가 여자란 사실이, 그것도 중년 아줌마라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너무나 힘들었다.

가능한 거울 속에 나를 보고 싶지 않아, 여성스러운 화장을 하는 것도 포기하고 가발도 벗어 버린 것뿐.

 

오늘 친구들 온다고 했지?”

 

툴롱 샐러드의 마지막 버섯 한 조각을 힘들게 집던 지호에게 넌지시 물었다.

 

. 8시에 여기에서 모이기로 했으니 머잖아 몰려올 거예요.”

 

바게트 빵껍질을 손가락에 잡고 접시 바닥을 문지르며 그가 말을 덧붙였다.

 

오늘은 뉴페도 있어서 인원이 좀 될 거예요. 의자가 충분하려나?”

 

그렇게 말한 그가 ㄷ 자로 된 카운터 뒤의 의자를 눈으로 셌다.

 

모두 열한 명이니 의자 두 개가 모자라는데...”

이 뒤에 간이 플라스틱 의자가 있긴 한데.”

 

주방 옆 창고 문을 열고 간이 의자를 꺼내자 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면 충분할 거 같아요. 이모. 오늘은 매상 제가 확실하게 올려드릴게요.”

 

그의 붉고 도톰한 입술의 한쪽 꼬리가 올라갔다.

오뚝한 콧날의 끝을 찡긋거리며 그가 슬쩍 한쪽 눈을 감고 나를 보고 윙크를 보냈다.

긴 속눈썹과 시원하면서 동시에 도발적인 눈매는 뭇 사내들 뿐 아니라, 주변의 여성들까지도 여럿 설레게 할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그런 그의 크고 맑은 까만 눈동자.

그야말로 그의 핸썸하고 지적인 도시남의 얼굴을 완벽하게 완성하는 화룡점정.

 

완벽한 외모, 그에 걸맞은 매너와 지적인 말투.

상대방에게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풍부한 상식과 지식.

자신이 원하는 순간에 상대를 심쿵하게 만들 수 있는 연애의 달인.

그런 지호와 연인인 한유준은, 아니 팽이는 평범한 행운남일리가 없다.

 

 

여기 맞아?”

맞아. 여기야 여기.”

정말 이름이 [쓰레쉬 앤 애쉬]?”

 

다 늙은 아줌마가 공연히 마음속에 설렘을 억누르고 있을 때 가게의 문밖이 떠들썩해졌다.

 

드르르르르륵

 

문이 열리더니 젊은 남정네들이 작은 가게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이모 처음 뵙겠습니다.”

이모. 안녕하세요.”

좀 좁은 거 같은데?”

아늑하니 딱 좋은데 뭘.”

저 안쪽으로 들어가.”

-. 저녁 되니 너무 날씨 쌀쌀하다.”

 

한마디씩 입 밖으로 내뱉으며 한자리 씩 차지하고 엉덩이를 붙이는 젊은 남자들.

똘망똘망하게 나를 바라보던 눈동자들이 마치 빛을 내뿜는 광선처럼 가게 내부를 샅샅이 훑는다.

 

술은 뭘로 하지?”

이쪽은 소주로 세 병 주세요.”

우리는 맥주로 시작하자.”

안주는 해물파전으로 주세요.”

 

제각기 한마디씩 떠들자 내 정신이 아득해지고 혼미해졌다.

 

그런 와중에 나의 시선에 들어온 한 젊은 남자.

굳은 표정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 돈 빌리고 도망간 인간을 길에서 우연히 만난 빚쟁이의 얼굴이다.

, 잔뜩 기대하고 온 가게가 생각보다 너무 협소하고 주인이 마음에 안 들면 짜증나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

 

어서 들어와요.”

 

그런 그의 얼굴을 보며 어색하게 내가 웃었다.

그의 가늘어진 눈이 잠깐 더 내 얼굴에 머물렀다.

 

이모. 맥주 다섯 병하고 소주 세 병부터 먼저 주세요. 간단하게 안주할 것도 좀 주시고요.

알았어요. 우선....”

 

쏟아지는 주문에 허둥대는 내 모습을 본 그 남자.

처음 들어온 가게를 마치 익숙하다는 듯 카운터 안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아이고, 우리 이 여사님 똥오줌 못 가리시네.”


모두 이모라고 부르건만 넉살 좋게 혼자 이 여사님이라며 사내가 주류 냉장고를 열었다.

내 첫 모습이 싫었던 건 아니었나 보네. 아니면 첫인상이 장사 안 해본 것처럼 어리버리해 보였던 것 때문이었을까?

 

소주하고 맥주는 제가 꺼낼 테니까요. 이 여사님은 해물파전 부탁해요.”

! 그래요. 그럼....”

 

내 가게의 카운터 안 주방에서 처음 보는 그 남자에게 지휘권을 뺏겨버렸다.

 

그렇게 남자는 주류 냉장고를 열고 익숙한 손길로 소주와 맥주병을 꺼내 카운터 위로 올려놓았다.

그런 그를 흘끗 넘겨 본 후, 이미 냉장실에 준비해놓은 커다란 그릇을 꺼내고 후라이팬을 불 위에 올렸다.

 

촤아아아아아

 

후라이팬의 뜨거운 기름 위에 해물파전이 노릇노릇 익어가기 시작했다.

 

커다란 접시에 바삭한 파전을 올려놓기 무섭게 등을 맞대고 있던 사내가 마치 먹잇감을 채가는 매의 발톱처럼 내 손에서 접시를 받아쥐었다.

 

우린 아직 안주도 없고만.”

 

왼쪽 구석에서 맥주를 기울이던 사내중 한 명이 투덜거렸다.

 

하늘아! 요 옆 마트에 가서 마른안주 할 것 좀 사와. 무가당 주스 하나하고.”

 

뭐라고 말을 건넬 틈도 없이 나와 같이 카운터 안에 있던 사내가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더니 개중 가장 나이가 어려 보이는 남자에게 만 원짜리 몇 장을 건넸다.

 

남는 건 내가 먹고 싶은 과자 사와도 괜찮죠?”

그러던가.”

앗싸! 개이드-!!”

 

얼굴에 정감넘치는 뽀얀 웃음을 터뜨린 어린 남자가 문을 열고 튀어 나갔다.

그릇에 집어넣어 국자 한가득 퍼담은 반죽을 다시 후라이팬 위에 부으며 나는 언뜻 고개를 돌렸다.

이미 카운터 위에는 배추김치와 깍두기 그릇이 적당한 거리를 두고 놓여져 있다.

젓가락으로 한쪽 귀퉁이를 떼어내 호호거리며 입안에서 전을 오물거리며 먹고 있는 한 사내.

소주병을 쥐고 옆 사람의 잔을 채우고 있는 또 다른 남자.

 

그런데 말야. 걔네들 어떻게 거기서 또 그렇게 눈이 맞았대애?” 다른 곳에서 1차로 간단하게 밥은 먹고 온다더니 반주도 기울였는지 적당히 술이 들어가 발그레한 볼에 웃음을 흘리며 옆에 앉은 사내에게 읊조리듯 묻고 있는 사내.

 

, 여기 짱 좋다. 아담하고 정감있고...”

그렇지? 여기가 팽이하고 내 아지트 아냐.”

마치 자랑이라도 하듯 한껏 높아진 목소리로 웃음을 흘리고 있는 지호까지.

 

에헤이! 이 여사 지금 뭐 하세요? 해물전 시커멓게 타버리겠네.”

옆에 서 있던 사내가 내 팔꿈치를 슬쩍 건드리는 것이 느껴졌다.

 

....!”

 

잘생긴 젊은 남자들 한꺼번에 몰려오니 우리 이 여사님 정신 하나도 못 차리시네.”

 

내게서 뒤집개를 빼앗듯 가져간 그가 익숙한 손놀림으로 전을 뒤집었다.

 

탄 부분만 포크 같은 걸로 긁어내고 먹으면 돼. 하루형.”

하루한테 그냥 맡기시고 이모님도 요기 앉으세요.”

그래요. 이모 제 맞은편에 앉아요.”

 

발그레한 표정으로 지호도 한마디 거들었다.

 

제 술 딱 한 잔만 받으세요.”

 

지호 커플과 자주 와서 꽤 많이 친해진 한이가 소주병을 드는 동시에 드르르륵 문이 열리며 한가득 안주를 담은 비닐 봉투를 손에 든 젊은 남자가 들어왔다.

 

내가 술을 잘....”

에이, 이모느은? 딱 한 잔만요. 안 받으시면 제 손이 부끄럽잖아요.”

 

겸연쩍은 표정의 한이가 씨익 웃었다.

얼떨결에 앞에 놓여있던 빈 소주잔을 들고 녀석이 기울이는 술을 받았다.

 

술 같은 거나 자극적인 음식은 제발 피하세요. 소화력도 떨어지는 상황에 최악입니다. 이 여사님!’ 그렇게 말하던 박홍근의 얼굴이 떠올랐다. ‘의사 말 좀 제발 잘 들으세요. 손해 볼 것 없으니까.’

 

그래도 이깟 소주 한잔 정도야.

딱 한 잔인데.

 

, 내 입술에 소주잔의 차가운 느낌이 닿았을 때였다.

등 뒤에서 불쑥 뻗어온 손이 내 손아귀에 쥔 소주잔을 빼앗아 갔다.

 

에헤이! 여사님 취하시면 안 되죠. 할 일도 많으신데.”

 

돌아보는 나의 시야에 한입에 잔을 털어 붓는 사내의 모습이 들어 왔다.

 

! 왜애?”

 

마치 짜증 난다는 듯 한이가 그를 쏘아보았다.

 

그런 한이를 그가 태연하게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이 여사님이 나중에, ? 맛난 후식을 만들어주신다고 했다는데, 취하시면 하시겠냐? 나중에 드려. 나중에.”

 

그렇게 말한 그가 비닐 봉투에서 마른안주를 꺼내는 어린 남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주스 사 왔지?”

. . 여기.”

 

무가당 토마토 주스 병을 건네받은 그가 다시 한이에게 그걸 건넸다.

 

, 그 부끄러운 손으로 이거 따라드리면 되겠다.”

 

그렇게 툭 내뱉은 그가 내게 빈 물잔을 하나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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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을수록 깊이 묻어나는 사람들의 냄새
싱그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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