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해바라기의 노래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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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먹어도 맛있네요?”
깍두기처럼 싹둑 썬 감자와 콩나물을 듬뿍 넣고 얼큰하게 끓인 라면을 후루루 입 안에 넣은 어린 남자가 해맑게 웃었다.
형들이 건네는 술을 꽤 마신 것으로 봤는데 여전히 상태가 좋은 걸 보면 술이 꽤 쎈 편이다. 아니, 기껏해야 스물한둘로 보이니, 저 나이 때에는 대부분 그렇겠지?
“믿거라 하고 민증 검사 안 했는데 설마 미성년자는 아니지?”
내 말에 입안 가득 라면을 넣고 있던 한이가 냅다 사방으로 뿜었다.
“미안. 미안.”
건네는 티슈를 받아 들고 입 주위와 카운터 위를 여기저기 닦아내던 그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 이모! 얘가 지금 몇 살인데...”
“으응? 몇 살인데 그래?”
흡족한 듯, 빙긋빙긋 웃고 있는 어린 남자를 바라보며 내가 물었다.
“이모! 하늘이 지금 스물여섯이에요. 우리 중에서만 막내인 거뿐이지. 얘가 어딜봐서....이모도 참!”
“아...”
“고맙습니다. 그래도 기분은 좋네요.”
하늘이는 그렇게 나를 보고 환하게 웃고 나서 다시 젓가락을 라면 그릇 안으로 집어넣었다.
시간은 이제 열두 시가 넘어있었다.
일행 중 다른 사람들은 모두 이태원으로 넘어갔다. 3차로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코스였다.
주말 밤을 뜨겁게 보내고 싶은 것은 젊음의 당연한 욕망이고 채우고 싶은 갈증이다. 그리고 가끔은 그런 와중에 끈적끈적하고 새콤달콤한 과정을 통해 인연을 만나기도 한다.
하루는 일요일에도 출근해야 하고 하늘이는 아침 일찍 다른 약속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한이는 애인이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집에서 몽둥이를 들고 벼르고 있어서, 잠시만 더 남아 라면으로 해장하고 뿔뿔이 흩어질 예정이었다.
“하늘이는 애인 없어? 한참 인기 많을 거 같은데.”
내 말에 녀석이 시선을 말 한마디 없이 라면만 먹고 있는 사내에게 던진 후, 다시 나를 바라보면서 싱긋 웃었다.
“그럼 혹시....”
“하루형이 저 싫대요.”
녀석이 대놓고 툴툴거리듯 말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사내는 못 들은 척, 그릇을 양손으로 들고 라면 국물을 들이켰다.
“오늘 고마웠어. 주방일 나보다 어떻게 더 잘하네? 하루라고 했지?”
언젠가부터 나도 모르게 말이 짧아져 있었다.
그걸 또 어색하지 않게 젊은 남정네들은 자연스럽게 받아주었다.
나를 흘끗 본 그가 별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하고 빈 라면 그릇을 카운터 위에 내려놓았다.
“이모. 하루 따로 좋아하는 애 있어요. 이년이 정신 못 차리고 혼자 이 지*랄 하는 거예요.”
“누구? 이런 날 데리고 오지 그랬어. 나도 얼굴 좀 보게.”
“아휴! 이모. 저년 진짜! 말만 좋아하는 년인지 놈인지 있다고 하지. 우리한테도 생전 얼굴 한 번 안 보여 준다니까요?”
“왜에?”
“모르죠. 진짜 그거 안 달린 년인지도 몰라요. 틀림없어. 저거 바이야. 바이.”
“아니면 짝사랑이거나. 나처럼.”
인상을 찌푸린 하루가 ‘꺼억’하고 트림을 했다.
“아. 김치 좀 한 젓가락 먹어야겠다.”
말투로 보아하니 자신에 관한 대화에 기분이 나쁜 건 아닌 듯했다. 그저 정말 김치가 먹고 싶었던 듯, 느긋하게 냉장고 문을 연 그가 김치통을 꺼냈다.
“야! 누가 보면 니년이 여기 주인인 줄 알겠다. 오늘 첨와서 지 부엌 들락거리듯 하네?”
그런 그를 보며 한이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흘리며 혀를 쯧쯧 찼다.
“정말 저 형. 미스테리예요. 벌써 몇 년째야? 좋아하는 사람 있다고 접근하는 사람들한테 철벽치는 게...”
“저년 내가 농담 아니고 좀 있으면 어떤 치마 두른 년하고 결혼한다고 청첩장 돌릴 년이야. 너두 빨리 냉수 먹고 정신 차려 이것아.”
“...휴우...”
그래도 양손으로 턱을 괴고 하루를 보는 하늘이의 표정에는 미련이 뚝뚝 묻어나고 있었다.
그런 녀석을 보면서 내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냥, 안 될 거 같다 싶으면 짝사랑 빨리 끝내고 나 좋다는 사람 만나서 알콩달콩 살고 그래. 요 위에 사는 용이도 한유준이랑 서로 죽고 못 살잖아. 햄 달달 볶으면서 말야.”
‘햄 볶는다’는 말이 입 밖으로 언뜻 튀어나왔다.
그 말이 느낌상 아주 올드한 듯해서 ‘노인네’라는 핀잔을 들을 것 같아 멋쩍게 웃었다.
그랬는데 웬걸. 무슨 이유에선지 셋 모두 경악을 한 얼굴이다.
입을 딱 벌리고 잔뜩 굳어져 있는 셋의 표정은 여간해서는 풀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뭐지? 하는 생각 속에서 내가 ‘팽이’라는 말 대신 ‘한유준’이라는 본명을 말해버렸다는 것을 순간 깨달았다.
“아, 그게 ‘팽이’가 ‘한유준’이잖아. 내가 어디서 팽이 본명을 들었더라?”
딴에는 넉살 좋게 넘어가려고 한 말이었는데, 오히려 셋의 표정은 더 굳어버렸다.
“내가 말을.. 잘못....한 거지?”
더듬거리며 말하는 나를 바라보던 셋 중에 그래도 제일 먼저 하늘이가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양 손바닥을 편 녀석이 제 양 볼을 소리가 날 정도로 짝짝 때렸다.
“이모. 그건 어디서 들으신 거예요?”
“그러게. 내가 그 말을 어디서 들었더라?”
여전히 눈을 똥그랗게 뜨고 있는 하늘이를 보면서 내가 중얼거렸다.
“이모.”
이제 제 표정을 되찾은 한이가 짐짓 다정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우리 셋만 있을 때니까 갑분싸가 이 정도로 지나는 거예요.”
“왜?”
그의 말은 좀 뜻밖이었다. 사람들 앞에서 본명을 밝힌다는 것이 이렇게 큰일이었나?
“.....아!”
순간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엄습했다.
이건 다시 말하면 타인을 내 멋대로 커밍아웃시키는 것 아닌가?
그것도 본인이 없는 곳에서, 이렇게 같은 게이도 아닌 그저 식당 주인이 안면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사려 깊지 못하고 비매너인 일이 틀림없다.
“내가 주제도 모르고 남의 귀한 이름을 사람들 앞에서 말해버렸네. 정말 주책이지? 이를 어쩐다.”
하늘이의 얼굴에서 한이에게로 시선을 돌려 표정을 살폈다. 그리고 다시 하루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부드러워진 둘의 표정과 달리 여전히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꼼짝않고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하루. 겸연쩍어진 나는 얼른 고개를 다시 하늘이에게로 돌렸다.
“이모.”
나를 부르는 한이의 목소리에 다시 시선을 그에게 주었다.
“팽이가 한유준이 아니예요.”
“뭐어? 팽이가 한유준이 아니야?”
“전혀 아니예요.”
“......”
뜻밖의 말에 나의 입이 다물어졌다.
내 기억 속에서는 지호는 유준이와 4년을 사귀었다.
물론 나는 유준이의 기억을 머릿속에 담고 있었으니 지호 쪽에서 보면 왜곡된 면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틀림없이 그 둘은 올 초여름까지 연인이 아니었던가?
“이 여사가 유준이를 어떻게 알아?”
여전히 굳어있는 표정으로 하루가 입을 열었다. 어째 서늘한 말투였다.
“걔 지금 어디 있는지 이 여사 혹시 알아?”
“나야...모르지. 내가 그걸 어떻게 알겠어.”
하루에게서 다시 한이에게 고개를 돌렸다.
내가 꺼낸 이야기는 도대체 어디로 흘러가는 것일까? 나의 기억과 앞의 세 사내의 현실 속의 사실은 어디가 얼마나 다른 것일까?
역시 아무리 관심을 가지고 스토킹을 한다고 해도 100프로 내부인들만큼 알 수는 없는 일이었겠지.
내 얼굴을 바라보며 속내를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던 한이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용이를 통해서 이모를 안지도 이제 석 달이 넘어가고, 하루가 멀다하고 자주 보면서 이모가 너무 좋은 분이란 거 잘 아니까 말씀드리는 거예요. 앞으로도 이모 계속 보고 싶고 여기 계속 단골하고 싶거든요.”
“......”
“여기 우리 셋은 지호랑 오랜 친구예요. 벌써 6년이 넘었네요. 아마.”
“그렇지. 나 재수하고 스무 살에 수능 보고 난 담에 종로 가서 형들 첨 만났으니까.”
하늘이가 손가락을 꼽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유준이는 지호가 4년 전부터 사귄 애구요.”
“......”
“둘이 그럭저럭 잘 지내는 줄 알았어요. 올해 초까지는요.”
“올해 초에 바람 피다가 딱 걸릴 때까지는.”
하늘이가 끼어들었다.
“넌 잠깐 잠자코 있어.”
한이가 녀석을 보고 슬쩍 눈을 흘겼다.
“누가 바람 피다가 걸렸다고?”
얼굴에 잔뜩 관심을 드러내고 묻다가 한순간 입을 다물었다.
남의 사생활에 ‘어머어머, 정말?’하면서 꼬치꼬치 캐묻는 아줌마의 모습. 그게 내 모습이었다. 그래서 그 와중에도 허망한 웃음이 나왔다. 아줌마 아니라면서. 스물아홉 먹은 남자라고 그리 난리블루스를 추더니. 역시 나는 아줌마였다.
“남 사생활 이러쿵저러쿵하고 싶지 않지만, 지호랑 유준이 이야기니까 말씀드리는 거예요. 우리 모두 유준이가 어떻게 된 건지 궁금하거든요.”
“......”
“지호가 지금 사귀는 팽이하고 몰래 만나다가, 신이라고 좀 아까도 왔었던 앤데, 걔한테 딱 걸렸거든요. 그런데 지호가 그랬대요. 유준이가 먼저 바람피워서 맞바람 피우는 거라고. 곧 헤어질 거라고.”
“......”
“사실, 우린 유준이를 지호를 통해서 알게 된 거라. 따로 만난 적도 없고 해서 그냥 그러려니 하고 흘려버렸어요. 뭐 만나고 헤어지고 바람피우는 거 새로울 것도 없구요. 모두 제 인생 지들이 사는 거죠.”
“......”
“근데, 4주년이라고 종로에 칵테일 집까지 예약하고 오라 해놓고 유준이가 열흘 정도 전에 감쪽같이 사라진 거예요.”
“사라져.....?”
“유준이 집이야 지호만 알고 있는 거라. 지호한테 나중에 얻어들은 건데, 가보니까 짐도 다 사라지고 감쪽같이 없어졌다고요. 빚지고 야반도주한 사람처럼.”
“......”
“지호 말이 이상하긴 했지만 뭐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살다 보면 소설보다 더 소설같은 일도 많이 벌어지잖아요?”
말을 멈춘 한이가 낮은 한숨을 쉬었다.
“근데, 제 애인이 유준이를 좀 아는데 전혀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그러는 거예요. 유준이가 지한이라는 애한테 돈도 이백이나 꿔줬는데 그것도 달라는 말 한번 안 하고 안 받고 가겠냐고요.”
“지한이?”
“유준이가 이삿짐센터에 소개시켜 준 애예요. 갈데없는 애, 며칠 묵게도 해 주고, 이사 가는데 월세 집 보증금 필요한 거 보고 나중에 갚으라고 이백 건네줬다고 그러더라고요. 정말 검소하고 알뜰하게 산다고, 생활하는 거 보고 자기도 인생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배웠다고 그랬다더라고요.”
“......”
“그런 애가 감쪽같이 야반도주하듯 사라졌다는게....”
고개를 갸웃거리던 한이가 무엇인가 미심쩍은 눈빛으로 나를 살폈다.
“나도 뭘 잘 모르긴 하지만...”
하늘이가 끼어들어 입을 열었다.
“그냥 내가 보기에는 그 유준이라는 형 말예요. 성격으로 보면 누굴 사귀면 일편단심 그 사람만 좋아할 거 같았거든요. 술 마시고 실수하는 그런 성격도 아니고 조용하고 가정적인 게 그냥 봐도 느껴지는 형이었는데. 그런 사람이 바람 피고 몰래 도망갔다는 게 아무리 생각해도...”
“뭐, 그 두 사람 사이 얘기를 남이 어떻게 알겠어?”
“그래도 그렇지. 형, 그래서 난 내 친구하고 그랬거든. 혹시 지호형이 유준이형하고 헤어지고 싶으니까 무슨 일 저지른 건 아닌가. 그래서 유준이 형 엄마가 그 내용 알아채고 복수하려고 슬며시 나타난 거 아닌가하고...”
그렇게 말하며 하늘이가 나를 슬며시 가리켰다.
짜-악!
그 말에 한이가 하늘이의 등짝을 스매시 했다.
“아! 왜 형!”
“이게 뚫린 입이라고! 쓸데없는 헛소리 좀 그만해. 말이 되냐? 그게?”
“......”
“그리고 걔 어머님 어렸을 때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고 들었거든?”
“그거야, 그냥 둘러댈 수도 있는 거잖아. 이쪽인 거 엄마가 알고 사이가 틀어졌다면 그렇게 돌려 말할 수도 있는 거 아냐?”
“니 맘대로 남의 인생 가지고 멋대로 소설 쓰지 마라. 그리고 그렇게 사이 틀어진 엄마가 내다 버린 아들 복수한다고 나타나겠냐?”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내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지금까지 내 기억 속의 진실이라고 믿던 것들이 한순간 뒤죽박죽이 되어버렸다.
“이제 쓸데없이 남 얘긴 그만하고.”
잠자코 있던 하루가 점잖고 낮은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얘들이 지금 취해서 할 말 못 할 말 구분 못하고 멋대로 지껄이는 거예요. 그러려니 하고 그냥 걸러 들으세요. 그리고, 이제 어떻게 된 내용인지 알았으니 나중에 다른 애들 앞에서 말실수하지 말아요. 이 여사님.”
넌지시 말을 건넨 하루가 카운터 위에 있던 물잔을 들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알았어. 앞으로 입 조심할게.”
“뭐, 그럼 됐어요.”
그렇게 말하는 하루를 보며 슬며시 내가 입을 열었다.
“근데 내가 이 씨인 건 어떻게 알고 자꾸 이 여사래?”
그 말에 하늘이가 까르르 웃었다.
“흔한 게 김 씨 아니면 이 씨니까 형이 그렇게 부른 거죠.”
“왜요? 그럼 이제부터 김 여사라고 부를까?”
그렇게 너스레를 떠는 하루와 다른 녀석들을 돌아보며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마치 내가 실제로 겪은 것처럼 머릿속에 박혀있던 기억을 이제 수정할 때가 된 거라는 생각에 아쉬움과 함께 마음 한쪽에 뜻 모를 아픔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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