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해바라기의 노래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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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중이 또 줄었네요.”

 

책상 위에 있는 내 차트 기록을 내려다보며 하얀 가운을 입은 박홍근이 혀를 쯧쯧찼다.

입술 끝을 구부리고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그가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보았다.

 

복부에 통증은 좀 어떠세요?”

그래도 조금 가라앉은 거 같네요.”

간 기능 저하 때문에 절대로 음주나 간에 부담되는 음식 드시면 안 됩니다. 검은 변 보신다고 했잖아요. 많이 쉬시면서 살살 산책이나 하세요. 좋은 거 많이 보시고요.”

그러고 있어요. 고맙습니다. 의사 선생님.”

 

뻣뻣하고 잘난 척하며 목이 깁스를 한 의사도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에 반해서, 물론 친절한 의사도 많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박홍근은 나에게 과도하게 친절하다. 혹시 내 기억 속엔 없다 하더라도 그와 썸이라도 탄 적이 있었던 건 아닌가 궁금한 적도 있었으니.

불륜까지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나는 이혼녀라하더라도 그는 가정을 가지고 있는 남자인 걸 알고 있으니 서로 좋아지냈다면 불륜이 맞다. 하지만 다시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런 관계인 것 같지는 않다.

집안 내용을 좀 알고 있는 눈치인 것을 보면 부자로 잘살고 있을 전남편의 지인일 가능성이 가장 큰 것 같다.

 

어제도 진현이 왔다 갔어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넌지시 그가 내게 말을 건넸다.

아직 한 번도 보지 못한 아들. 직장생활 잘하며 건실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했다.

 

남은 시간 진현이하고 같이 지내시지 그러세요? 진현이도 그러길 너무 바라고 있는데.”

그건.... 생각 좀 해볼게요.”

가게도 이제 그만 접으시고요.”

....?”

 

놀라 똥그래진 내 눈을 흘끗 본 그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여사님이 몰래 하시면 제가 모를 줄 알았습니까? 여사님이 뭘 하시는지 제가 훤히 다 알고 있어요.”

“......”

그만 하세요. 조금 더 갑시다. 내년 봄에 꽃구경하고 싶지 않으세요?”

 

그의 그 말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다가오는 죽음을 이제 나는 제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가끔 혼자 집에 우두커니 앉아 있을 때 스멀거리며 몰려오는 억울함에 우울해질 때만 제외하고 말이다.

, 겨우 쉰다섯이다.

누군 살 만큼 살았다고 투정하지 말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나이 먹었다 한들 하고 싶은 것이 없을까?

 

이제는 내가 스물아홉의 남자였다고 스스로 우기지도 않는다.

내 모습 그대로 이제 모두 받아들였다.

뒤틀린 욕망으로 인해 미칠 듯한 짝사랑에 스토킹한 거였든, 아니면 돈을 써 사람을 산 거였든, 얻어낸 정보를 내가 실제로 경험한 기억마냥 조작해 머릿속에 남아있는 장면들도 이제 부질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제는 정말 내가 누군지 궁금하다.

 

이미연

 

나는 쉰다섯 내 평생을 도대체 어떻게 살아왔던 것일까.

모든 기억이 마치 포맷이 된 듯 삭제된 채 이렇게 죽음을 맞이한다면 그것이 너무 억울할 것 같다.

 

진현이를 만나보려 했다.

내가 내 뱃 속으로 낳은 내 아들.

박홍근에 따르면 내 아들은 나를 매우 그리워하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날 더러 꼭 만나보라고 했다. 더 늦기 전에.

어찌 나도 그런 생각이 들지 않겠는가.

 

녀석이 어떻게 생겼는지 너무나도 궁금해 녀석의 모습을 찾으려 했다.

그렇게 찾아낸 것이 휴대폰에 저장된 옛날 사진 몇 장.

돌 사진이었던 듯, 한복을 입고 비단 모자를 쓰고 있던 녀석의 귀여운 얼굴.

희망유치원이라는 커다란 광고판 앞에 다른 세 녀석과 함께 환하게 웃고 있는 녀석.

초등학교 시절이었던 듯, 무엇이 못마땅했던지 활짝 웃고 있는 내 품 안에서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는 녀석의 얼굴.

 

그것이 전부였다.

 

이제는 서른이 넘었을 내 아들.

녀석의 기억 속에 나는 어떤 모습일까? 마음씨 좋은 엄마였을까? 사랑을 듬뿍 준 엄마였을까? 아니면 자신의 욕망에 취해 녀석을 무심하게 방치하고 소홀히 한, 엄마라 불릴 자격도 없는 못된 인간은 아니었을까?

그건 학대다.

 

난 틀림없이 엽기적인 엄마였을 것이다.

남편과 이혼하고 제 뱃 속으로 낳은 세 아이도 버리고 집을 나오지 않았던가.

진현이를 제외하고 나머지 두 아이를 박홍근은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그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가족 모두 나를 버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10년 동안을 아무도 찾지 않고 혼자서 이곳에서 외롭게 늙어가고 있었다는 것이 그 모든 것을 솔직하게 발가벗겨 놓고 말해주는 것이다.

젊은 놈 뒤나 따라다니며 정신병자처럼 제 자신을 스물아홉 남자라고 믿고 살아가는 인간 따위를 도대체 가족 중 누가 좋아했겠는가?

 

주위에 아무도 없이 고독하게 살았으니 20억이 되는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유언을 썼겠지.

 

나는 절대로 진현이를 만날 수 없다.

내가 도대체 무슨 낯짝으로 내 아들을 만날 수 있단 말인가?

가족을 등한시하고 자식을 버리고 이렇게 인생을 낭비한 인간이다.

그런 년이 제 죽기 직전이라고 어떻게 엄마라고 찾아오는 아들을 만나는가?

그저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나는 속죄하련다.

그런 내 아들이 앞으로 행복한 삶을 살게 해 달라고 신에게 무릎 꿇고 비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다.

 

 

 

 

 

드르르르륵!

 

가게 문 열리는 소리에 후라이팬에 김치를 볶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이모. 저 왔어요.”

 

가늘게 뜬 눈에 웃음이 가득 담은 채 하늘이가 나를 보며 손을 흔들었다.

그 뒤로 한이와 오션이가 따라 들어왔다.

 

어서들 와.”

이모 이제 가게 그만하신다면서요?”

 

카운터 아래 의자를 당기며 나를 바라보는 하늘이의 표정은 아쉬움으로 가득했다.

 

사정이 있어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앉아 김치볶음밥 거의 다 했다.”

어얼! 고맙습니다.”

 

고개를 바짝 숙이고 카운터 아래 구멍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온 하늘이가 수저와 젓가락 세팅을 시작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용이하고 팽이가 안 보이네?”

 

매일 오다시피 하던 녀석 둘이 어느 순간 발을 뚝 끊었다.

애초에 지호를 가까이에서 보려고 가게를 시작했던 터라 녀석 커플이 오지 않자 슬며시 궁금했지만, 이 녀석들이 아지트로 삼고 매일 찾아오면서 오히려 얘들과 쿵짝이 더 맞게 되었다.

 

평상시에 녀석들이 하는 대화를 보고 대충 눈치는 채고 있었지만 그래도 혹시 다른 이유가 있나 싶어서 그렇게 슬며시 녀석들에게 물었다.

 

둘이 위태위태한가 보죠. .”

 

별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한 한이가 내가 건네는 볶음밥이 담겨있는 접시를 받았다.

 

이 위 용이형 집에서 동거하다가 얼마 전에 팽이형이 짐 빼서 나갔다고 그러던데요?”

저런. 서로 조금씩 더 참고 지내면 좋았을 텐데.”

 

속에 없는 말을 건네고 전자렌지에 돌린 죽을 꺼내 녀석들의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몸이 많이 안 좋으신 거예요?”

 

내가 간암 말기라는 것을 모르고 있는 녀석들.

아무리 그렇다고 한들, 그리고 이제 겨울이라 아무리 두꺼운 옷으로 몸을 두른다 한들, 흐릿해지고 빛이 사라지는 눈동자에 푹 꺼진 볼살까지 녀석들에게 감출 수는 없는 일이다.

눈치 빠른 녀석들이 내가 어느 정도 몸이 아프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겠는가.

 

아냐. 그냥 얼마 동안 쉬고 싶어서. 못 가봤던 여행도 좀 하고.”

 

그렇게 얼버무리고 죽을 한 수저 떠서 입속에 넣었다.

 

한파 특보 내렸어요. 이 추운 날씨에 어딜 가신다고...”

 

나를 바라보는 한이가 측은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그냥 겨울 동안 편하게 집에서 쉬시다가 내년 봄에 날씨 좋아지면 같이 놀러 가요. 제가 한번 모실게요.”

 

입을 오물거리며 하늘이가 나를 바라보았다.

막내면서도 가끔 녀석은 나이에 걸맞지 않게 의젓한 구석이 있다.

저 나이에 나도 이 녀석들처럼 주변의 타인들을 걱정해 주는 말을 건넸을까? 말이라도 이렇게 따뜻하게 건네 줄 만큼 나도 괜찮은 인간이었을까?

 

내 아들 진현이도 이 녀석들처럼 이렇게 건강하고 밝게 자라주었을까?

지금 이 못되고 못난 엄마가 아무 자격도 없이 느끼는 행복만큼 녀석도 행복하게 살고 있을까?

 

뭘 그렇게 생각하세요?”

 

한이가 수저를 놓고 물었다.

 

아냐. 그냥 이렇게 좁고 별 볼 일 없는 가게까지 찾아와서 매상도 올려주고 하니까 고맙다는 생각이 나서...”

무슨요! 가격도 턱없이 싸게 받으시면서. 거의 공짜잖아요.”

그러게요. 게다가 맛도 딴 데하고 비교도 안 되는데...”

고마워.”

 

슬며시 몸을 일으켰다.

 

그게 아직 남아있던가?”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먹던 죽그릇을 개수대에 넣고 주방 뒤에 있는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펜트리로 쓰고 있는 곳이었지만 한쪽에 작은 의자가 있어 녀석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잠시 앉아 쉴 수도 있었다.

손바닥을 가슴에 얹고 살살 문지르다 보니 기다리던 트림이 나왔다.

가슴을 누르는 듯한 통증도 사라져 한층 개운해진 마음에 약봉지를 찾아 입에 털어 넣고 미리 놓아두었던 물잔을 들었다. 그리고 삼키기 전 입안을 헹구듯 슬쩍 가글을 했다.

 

온전하지 않은 몸을 이끌고 이곳에서 이렇게 버텨온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처음에야 제정신이 아니고 미쳐서 그랬다고 치자.

마음속을 휘몰아치던 격류가 다 빠져나고 난 뒤, 지금까지 이렇게 내 가게랍시고 문을 열고 앉아서 이렇게 녀석들을 기다렸던 건 왜일까?

 

6개월 동안, 내가 하고 싶은 일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금도 있었다.

사람을 사서 옆에서 수발을 들게 하고 세상을 여행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던 일.

아니면 쇼핑이나 즐기며 유한마담처럼 그렇게 살아가는 또래의 여성들과 시시덕거리면서 살아갈 수도 있었다.

 

외로움이었겠지?

내 발목을 이곳에 계속 묶어 놓고 있던 것은...

 

내 자신도 알지 못하는 텅 빈 마음 한구석.

녀석들과 나누는 시시콜콜한 농담, 그런 녀석들의 삶을 가끔 들여다볼 수 있는 이 자리.

따뜻한 관심과 말로 나의 빈자리를 메워주는 이 녀석들.

그것이 내가 이곳을 지금까지 떠나지 못했던 이유였던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이제 내게 남은 시간이 없다.

지금도 내 귓속에는 마치 시계가 박혀있는 듯 재깍재깍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래도 녀석들 덕분에 행복했다.

 

다시 올여름으로, 내 기억이 있는 그 처음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아마도 틀림없이 똑같은 결정을 하고, 지금 나는 바로 이곳에 있을 것이다.

어쩌다 보니 저 밖의 녀석들이 모두 내 자식 같다.

아니 내 자식이 되었다.

이제 더 이상 녀석들에게 따뜻한 밥 한 그릇 건네주지 못할 것이고 녀석들이 건네는 시원한 소주 한잔 같이하지 못할 것이다.

슬며시 몸을 일으켜 문을 열었다.

 

카운터 위에 올려져 있던 그릇들은 모두 사라져 깨끗하게 설거지 된 채, 개수대 옆 철망 선반에 가지런하게 꽂혀있다. 이제 카운터 위에 올려져 있는 건 소주 두 병과 맥주 한 병.

주방 옆 벽에 걸려있던 기다란 나무접시가 녀석들 앞에 놓여 있고 그 위에는 과자와 마른안주가 소복이 담겨있다.

 

어느새 들어와 냉장고를 뒤져 미리 준비해 놓은 파전 반죽을 꺼내 후라이팬에 올려놓던 젊은 녀석이 나를 돌아보았다.

 

에헤이! 이 여사님 음식 하기 싫으니까 어디 숨으셨다가 이제 나오시네.”

하루는 언제 왔대? 오늘 못 온다고 하지 않았어?”

회사 일로 바쁘긴 한데 이 여사님 얼굴이 떠오르더란 말이죠.”

 

뒤집개로 뭉쳐있던 파를 골고루 펴면서 녀석이 너스레를 떨었다.

 

참새가 방앗간 그냥 지나칠까. 술 생각이 났겠지.”

퇴근 시간 가까워지면서 소주 생각에 손가락이 이렇게 떨렸겠지....파파파파파팍

 

반쯤 소주가 들어있는 잔을 든 손을 하늘이가 수전증이 있는 사람처럼 파르르 떨며 흉내를 냈다. 그리고 녀석들은 아무 근심 걱정 없는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며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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