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를 먹는 집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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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를 보고 찾아간 곳은 번화가에서 조금 떨어진, 야산 중턱에 자리잡은 2층짜리 단독주택이었다. 야트막한 야산은 산이라기보다 언덕에 가까웠다. 집 주변은 숲으로 둘러싸여 있고 근처 민가는 산 아래 논밭에 띄엄띄엄 흩어져 있었다.
오래되어 낡았지만 벽돌로 지은 집은 그런대로 튼튼해 보였다. 시내에서 거리가 있는 게 흠이었지만 나름대로 마당도 있고, 주변이 조용하고 풍광도 괜찮았다.
이런 곳에 집을 지어놓은 걸 보면 전원주택이 아닐까?
한가한 여생을 보내려고 시골에 별장을 지어놓는 사람들을 혁구도 알고 있었다. 어쩌면 그런 집일 거라고, 무료로 세를 주는 것도 그래서일 거라고 마음대로 생각했다.
"계세요?"
혁구는 대문간에 서서 집안을 향해 소리쳤다. 대답이 없었다.
가슴까지 오는 대문을 슬쩍 밀자 그냥 열렸다. 워커 신은 발을 안으로 들이밀고 마당으로 들어섰다. 저벅저벅 흙바닥을 밟는 소리 외엔 쥐죽은 듯이 고요했다.
마당은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지만 사람이 살지 않는 집에서 나는 특유의 냉기가 감돌았다.
내가 잘못 왔나?
폰을 꺼내 메시지를 확인했다. 주소는 틀림없었다. 조금 머쓱해진 혁구는 구경이나 할 생각으로 집 주변을 둘러보았다. 현관과 샷시 창문은 모두 굳게 닫혀 있고 내부가 보이지 않도록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다.
"계세요?"
혁구는 현관문을 두드렸다. 응답이 없었다. 집안에 사람이 있나 싶어 문에 귀를 대 보았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너무 조용한데.
뭐야.
사람 오라고 해놓고.
낚시질을 당한 건가 싶은 생각에 순간 짜증이 났다. 시간 낭비했네.
돌아가려고 발걸음을 돌릴 때였다.
순간 뒤를 돌아본 혁구는 깜짝 놀라 움찔했다.
언제 와 있었는지 발자국 소리도 없이 대문간에 사람이 서 있었다.
"집 보러 오셨죠?"
사십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아주머니였다.
"네. 맞는데요."
"아, 저희 부동산이에요. 집 보러 오실 거라고 해서 왔거든요."
그렇구나.
혁구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 올 때부터 이상하게 적막한 분위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긴장해 있었다. 부동산 아주머니라는 말에 괜한 안도감이 들었다.
"집주인 분은 벌써 승낙하셨어요. 계약 하실거죠?"
"전 만나보지도 못했는데요."
갑자기 일을 진행시키려는 아주머니에게 혁구는 조심스럽게 대응했다.
"그냥 여기 사인하고 들어가 사시면 돼요. 요즘 빈집이 많아가지고, 집주인들이 골치를 많이 썩어요. 사람이 안 살면 집이 빨리 낡아버리니까, 어차피 자주 수리하고 해야 되면 유지비가 더 들고 그래서 차라리 그냥 누구 들어가 살면서 관리하게 하는 게 비용이 더 적게 들어요. 요즘 지방 위기다 뭐다 해서 사람 끌어들이려고 얼마나 노력들을 하는지. 여기가 좀 번화가에서 거리는 있어도 조용하고 경치도 좋고 살기 얼마나 좋은데요. 아이고 참 그러고 보니 얼굴도 아주 잘 생겼네. 체격도 훤칠하고. 혹시 총각이에요? 가족 있으면 가족들하고 같이 살기도 좋아요. 호호호."
아주머니는 물어보지도 않은 말까지 줄줄 읊어가며 보험 권유하러 온 외판원처럼 적극적으로 굴었다. 그래서 알고 싶지 않은 사정까지 자세히 알게 되었다.
뭐 그런 사정이라면야.
그렇게 수상한 건 아니었네.
어쩌면 지자체에서 지원금을 받는 걸지도.
나름대로 합리화하며 혁구는 사정을 알아서 이해했다.
"자, 여기."
눈치빠른 아주머니는 파일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임대차 계약서였다. 어차피 돈이 오가지도 않는 계약이라 뭐 확인하고 할 것도 없었다.
절차가 조금 허술하단 생각은 들었지만, 시골이니 그렇겠지 라고 생각하고 혁구는 계약서에 서명했다.
"지금 바로 들어가셔도 돼요."
본심을 숨긴 악당같은 웃음을 짓더니 아주머니는 총총거리며 멀어져갔다.
다시 빈 집에 혼자 남겨진 혁구.
확실히 혼자 살기엔 큰 집이었다.
관리인 대신 그냥 살게 해주는 거라니 그렇게 나쁘진 않았다.
몸 상태나 키, 자지 크기를 물어본 것도 나름 이해가 갔다. 질문이 좀 무례하긴 했지만 집 지키는 개라면 건장한 수컷이 좋은 거겠지.
그래도 얼굴 한 번 못 본 건 좀 그런데.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하며 혁구는 현관문을 당겼다. 현관문도 잠겨 있지 않았다. 중문을 열자 거실이 한 눈에 들어왔다. 내부는 깨끗하게 치워놓은 상태였다. 아무것도 없는 집안은 썰렁했다. 오랫동안 아무도 들어오지 않은 듯 먼지가 희미하게 쌓여 있었다.
어차피 청소를 해야 하므로 혁구는 워커를 신은 채 거실로 들어섰다. 먼지쌓인 바닥에 워커 발자국이 새겨졌다.
벽과 천장 등을 둘러보며 혁구는 거실 안을 거닐었다. 천장과 벽은 원목으로 마감했고 바닥도 원목 마루였다. 마당 쪽으로는 열 수 없는 통유리로 된 창이었다. 벽 한 쪽엔 벽난로도 있었다.
확실히 별장용으로 지은 집이구나.
혁구는 쳐놓은 커튼을 확 걷었다. 침침한 거실에 햇빛이 들어오자 제법 화사했다.
1층엔 거실에 딸린 주방과 방 하나였다. 2층으로 올라가자 방이 두 개 있었다.
계단에서 가까운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방에는 여닫을 수 없는 고정창이 하나 있었고 텅 비어 있었다. 더 볼 게 없어 방을 나왔다. 구석에 있는 두 번째 방은 앞의 방과 달리 방문이 철제로 된 육중한 문이었다.
손잡이를 돌리자 창문도 없는 방 안에는 매트리스만 덜렁 놓인 침대 하나와 짐을 정리해놓은 듯한 커다란 박스가 두어 개 있었다.
창문이 없어서 답답하긴 해도 햇빛이 안 들어오니 잠자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도 철문이라 소음도 차단되고 괜찮아 보였다.
집주인이 잠귀가 밝은 편인가 보네.
혁구는 침대 위에 털썩 걸터앉아 보았다. 먼지가 많을 줄 알았는데 바닥과 달리 침대는 깨끗했다.
어제까지 누가 쓰던 것처럼.
자세히 보자 하얀 시트에 누렇게 찌든 얼룩같은 게 희미하게 보였다. 무슨 액체를 흘렸다가 마른 듯 얼룩은 여러군데 묻어 있었다.
시트를 바꿀까 하다가 어차피 임시로 살 건데 귀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냄새만 안 나면 됐지 뭐.
엉덩이를 튕겨보니 매트리스 상태도 괜찮은 것 같았다.
저 박스 안엔 뭐가 든 거지.
남의 물건이라 꺼림직했지만 어차피 옮겨야 할 테니 내용물이 뭔지 확인이라도 해 두고 싶었다. 혹시 무거운 게 들어있을 수도 있으니까.
테이프를 뜯고 박스를 열었다.
'이게 뭐지?'
혁구는 가슴이 울렁거리는 듯한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박스 안에 들어있던 것은 누군가가 입었던 흔적이 역력한 옷가지였다.
회색과 검은색 등 여러 종류의 츄리닝, 긴팔 맨투맨이나 셔츠 등의 상의, 청바지와 면바지 등의 바지들, 신던 양말, 입던 팬티.
며칠 입다가 빨지 않고 그대로 구겨넣은 듯한 옷들. 사이즈도 제각각인 것을 보니 여러 명 분이었다.
박스 안에서는 꼬랑내와 쉰새가 섞인 남자 체취가 섞여 올라왔다. 대체 어떤 경위를 거쳐서 이런 짐이 나오게 된 건지 도저히 짐작이 안 갔다.
나름의 사정이 있겠지, 너무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하고 다음 박스를 열었다.
그러나 다음 박스에 들어있던 것은 혁구를 더 황당하게 만들었다.
역시 옷가지 더미였는데 제일 위에 포개져 있던 것은 부츠 한 켤레였다. 반광 가죽으로 만들어 무릎 밑까지 올라오는, 목이 꽤 긴 부츠였다. 아마도 승마용이나 바이크용 정도로 쓸 법한.
옷가지 더미에 섞여있던 것은 다리에 딱 달라붙을 것처럼 통이 좁은 하얀색 바지였다. 승마용 바지처럼 보였는데 펼쳐들어 보자 실소가 절로 나왔다.
바지의 엉덩이 부분은 일부러 개조한듯 봉제선이 세로로 깨끗하게 열려 있었다. 입으면 통이 좁은 바지의 탄력 때문에 엉덩이골 사이가 저절로 벌어질 것 같았다.
앞부분은 자지와 고환 모양으로 툭 튀어나와 있었는데 바지를 입은 뒤 딱 맞게 끼울 수 있어 보였다.
*발.
어떤 변태 새*가 이런 걸 입지.
밑에 깔려 있던 것들은 눈구멍 없이 입구멍만 달린 복면, 안대, 재갈, 삼각 팬티 형태의 가죽 끈, 여러 종류의 로프, 양쪽에 집게가 달린 끈, 초, 크기와 굵기가 제각각인 막대기들, 남자용 정조대, 크기와 형태가 모두 다른 수십 종류의 딜도, 전기 충격기, 변압기, 전선, 앞부분이나 엉덩이골이 뻥 뚫린 속옷 따위의 난잡한 물건들이었다.
혁구는 놀라서 입을 헤 벌린 채 그 물건들을 내려다 보았다.
모이는 결론은 한 가지였다.
집주인 이 변태 새*.
그것은 일반인의 상상을 아득히 초월하는 무언가였다.
괜히 남의 비밀을 들춰봤다는 생각에 혁구는 민망하기도 하고 약간 후회가 들었다. 그래서 없었던 일로 하기 위해 서둘러 박스를 다시 닫으려 했다.
부스럭.
박스를 닫으려던 혁구의 손길이 순간 멎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뒤에서 쳐다보는 듯한 느낌.
뭐지.
재빨리 고개를 돌려보자 열린 방문 사이로 빈 복도가 보일 뿐이었다.
분명히 인기척이 있었는데.
"거기 누구 있어요?"
혁구는 복도로 나와 계단참을 내려다 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누가 쳐다보다 도망쳤다면 계단 내려가는 소리가 났어야 했는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낯선 집에 혼자 있어서 그런 건가?
괜히 예민해진 것 같아 고개를 저었다. 박스들은 나중에 아래층으로 옮겨놔야지.
이미 살 곳도 구했겠다, 달리 할 일이 없어진 혁구는 다시 조금 전의 침대에 걸터앉아 폰으로 인터넷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저녁까지 여기서 빈둥대다가 시내에 나가 밥이나 사먹고 올 생각이었다.
다리를 떨면서 앉아 있다가, 비스듬히 기댔다가, 쭈그리고 옆으로 누웠다가, 결국 침대 위에 대자로 누웠다.
어제부터 계속 발품을 팔아서 그런지 눕게 되자 졸음이 왔다.
한숨 잘까.
폰을 내려놓고 멍하니 천장을 응시했다. 베개가 없어서 약간 불편했다. 눈이 감기려는 찰나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유니폼은 마음에 들어요?"
아까 통화했던 음침한 남자 목소리였다. 혁구는 이 사람이 집주인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유니폼은 무슨 소리지.
"네? 무슨 유니폼이요?"
"당신이 마지막 순간까지 입게 될 유니폼이요."
무슨 소릴 하는 거지.
말하는 내용도 그렇고 목소리도 그렇고 불쾌했다.
"하, 이봐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까도 그렇고 *나 무례하게 굴더니 정작 계약할 때는 코빼기도 안 보이고. 이상한 소리나 늘어놓고."
혁구는 그래도 이 집에서 나간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괜찮은 집에서 공짜로 살게 해줬으니까. 이상한 부분만 따지고 싶을 뿐이었다.
"화내는 걸 보니 마음에 드는 모양이네요."
"아 뭔 소리예요? 뭐가 마음에 든다고?"
"한 번 솔직하게 입어봐요. 잘 맞을 테니까."
뚝-
"여보세요? 여보세요? 야, 야! 아 *발."
이 새* 뭐지 진짜.
한 번 만나서 줘패고 싶었다. 월세 몇 푼에 이상한 새* 참아줘야 하는 자기 자신도 *신같이 느껴졌다.
아, *발.
담배나 한 대 피워야지.
나가는 건 나중에 생각해 보자.
창문도 없는 방에서 피우면 너구리굴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 환기구는 설치되어 있었다.
어차피 내 집도 아닌데 뭐.
혁구는 침대에 누워 담배를 빼물고 불을 붙였다. 파란 담배 연기가 꼬리를 끌며 천장으로 올라갔다.
유니폼?
담배 연기로 텅 비어가는 머릿속에서 조금 전 그 말이 떠올랐다.
무릎까지 올라오는 부츠.
자지집이 달려 있던, 뒤가 터진 바지.
난잡한 물건들.
혁구는 담배를 입에 문 채 일어나 조금 전의 그 박스를 다시 열어보기 시작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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